국왕의 이혼 때문에 종교혁명이 일어난 잉글랜드
29 국왕의 이혼 때문에 종교혁명이 일어난 잉글랜드
헨리 8세가 첫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로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을 선언한 후 잉글랜드는 프로테스탄트화의 길을 걸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카톨릭 탄압은 카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스페인을 자극했다. 스페인은 잉글랜드에 무적함대를 보내 점령하려 했으나 아르마다 해전에서 대패하고, 이후 스페인은 몰락의 길에, 영국은 강성의 길에 접어들었다.
엘리자베스 사후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되고 영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지배중인 아일랜드의 종교는 저마다 달라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의회도 왕의 카톨릭 우대를 규탄하는 의회파와 국왕파 둘로 나뉘어 군사적으로 충돌했다. 청교도혁명의 시작이었다.
주도권을 잡은 크롬웰 이하 의회파는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1649년 잉글랜드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자 의회는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즉위시키며 군주제를 부활시켰다. 종교대립은 계속되었고 1685년 즉위한 제임스 2세가 아들에게 카톨릭 세례를 시키자 프로테스탄트파는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 윌리엄을 초청해 윌리엄 3세로 추대했다(명예혁명). 윌리엄 3세는 잉글랜드 의회가 제출한 ‘권리선언’을 승인하여 영국 입헌군주제 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
근대
30 영국이 최강의 식민지 제국이 된 경위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아시아로 진출하기 전 영국의 해외교역은 사략선의 약탈이 주였다. 약탈로 벌어들인 자금은 해외무역․식민활동에 쓰였고 항해기술도 발달했다. 뒤늦게 식민지 사업에 진출한 영국은 북아메리카에서 네덜란드로부터 뉴암스테르담(뉴욕)을 빼앗았고, 찰스 2세 치하에서는 북아프리카 탄지르와 인도 봄베이를 획득했다. 봄베이의 획득은 인도 교역의 발전으로 이어져 인도 지배의 기반이 된다. 또한 북아메리카 식민지와 인도 식민지 싸움에서 프랑스에게 승리, 식민지를 점점 넓혀갔다.
1776년에는 미국 독립전쟁에서 패하며 미국 식민지를 잃기도 했으나, 이후 프랑스 혁명을 막기 위한 대불동맹에 참여하여 빈 회의에서 마르타섬과 세이론섬, 케이프 식민지를 획득, 같은 시기 호주와 서인도에도 진출해 7개 바다를 지배하는 제국이 되었다.
31 프랑스 혁명은 무의미했다? 프랑스 혁명 평가 논쟁
프랑스혁명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학자마다 다르다. 이 장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을 소개한다.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조르주 르페브르 등의 부르주아 혁명론. 혁명 전 앙시앙레짐(구체제)에서는 제1신분 성직자와 제2신분 귀족이 지배층이었는데, 상공업 발달로 성장한 부르주아는 관직을 사서 귀족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귀족의 거부로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1789년 귀족이 루이 16세의 절대왕정에 도전한 사건(귀족의 혁명)을 계기로 부르주아는 힘을 강화해 혁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부르주아 혁명). 1신분과 2신분은 국외로 도망, 주도권을 되찾고자 외국의 군대를 개입시켰으나 시민과 농민이 부르주아 편에 서서 혁명을 지켜냈다. 이들 중 일부는 더 급진적인 공화주의의 실현을 두고 부르주아와 다투었다(민중과 농민의 혁명). 최종적으로는 부르주아가 승리하며 부르봉 왕가를 무너뜨리고 주권을 획득했다.
부르주아 혁명론은 경제와 현실 사이에 모순이 생겼고 그 모순이 생산관계를 변화시켜 하부구조가 상위구조를 무너뜨리는 계급투쟁이 일어나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을 확장하면 사회가 성숙할 때마다 계급투쟁이 일어나 마지막에는 공산주의 사회에 이른다는 마르크스주의와 연결된다.
영국 역사학자 알프레드 코반은 이러한 해석을 비판했다. 코반의 수정주의에서는 부르주아는 돈으로 귀족이 될 수 있었으며, 두 계급은 함께 명사라는 엘리트층을 구성했다고 본다. 당초 혁명을 이끈 것은 명사들로, 그들은 국민의회를 이끌며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치체제를 만들려 했다. 민중이 혁명에 개입한 뒤로는 명사와 하층 부르주아가 이끄는 시민들이 이상적인 체제를 토론, 투쟁했다. 명사를 중심으로 한 국민의회에서 제정된 1791년 헌법은 시민이 국정에 참가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로베스피에르를 비롯 자코뱅파가 이를 비판하며 명사를 배제한 국민공회를 소집, 공화제가 채용된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을 계급투쟁이 아니라 ‘여러 계급이 섞인 당파들이 벌인 권력투쟁’이라고 주장했다. 또 혁명으로 프랑스 경제는 성장하지 않았고 해외식민지도 잃어버리면서 오히려 국력이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혁명의 성과로 여겨진 전국시장의 창출, 도시화와 공업화, 문맹률 저하 등은 혁명이 없어도 일어날 일이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냈다. 민중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서로의 주장을 나누면서 여론을 형성하며 투표로 의원을 뽑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혁명으로 현 정권을 축출할 수도 있다. 또한 국왕은 의회 없이는 나라를 통치할 수 없게 되었다.
32 아르헨티나 자유주의 정책의 천국과 지옥
19세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아르헨티나는 19세기 후반부터 자유개방경제정책을 실행했다. 농․목축업을 주력사업으로, 유럽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이민과 투자를 받고, 공업품은 수입에 의존하는 정책이었다. 아르헨티나 지도층은 아담 스미스의 ‘작은 정부’를 지지하였기에 경제개발도 민간주도로 이루어졌다.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순조롭게 발전해 20세기 초에는 GDP 상위 10위에 오를 정도였으나 20세기 전반 급박한 국제관계 속에서 극단적인 자유주의 정책의 위험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는 대토지 소유자와 무역상에 집중되여 빈부 격차가 확대되었고, 약자들에 대한 사회안전망이 부족했다. 외국자본은 2차․3차 산업을 잠식했으며 국내기업은 계속 도산했다. 아르헨티나의 외자에는 영국 자본이 많았는데,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블록경제를 도입하자 그 경제권에 들지 못한 아르헨티나에 불황이 닥친다.
농산품 수출도 부진해진 아르헨티나는 급히 공업화 정책을 도입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그나마 성장한 공업자본가․중산층․공장노동자가 비판세력으로 대두, 정치경제적 혼란이 커졌다. 여기에 군부가 대두하여 군인 후안 페론에 의한 독재체제가 들어서게 되었다.
33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남북문제로부터 탄생했다?
이탈리아는 남북의 문화가 많이 다르며 사이도 좋지 않다. 이러한 남북문제는 근현대 이탈리아 역사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는 서로마 제국 붕괴 후 통일되지 않은 채 지역마다 개별 권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북부에는 상업으로 발달한 도시왕국이나 소왕국들, 중부는 교황령, 남부는 프랑스나 스페인 왕가가 지배하는 농업왕국이라는 구조가 오래 지속되며 남북은 경제격차가 커졌다.
한편 18세기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유럽 다른 국가에 뒤처지지 않도록 이탈리아가 통일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보급되었다. 1848년부터는 각지에서 독립운동이나 공화혁명, 입헌혁명 등이 일어나지만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번번히 가로막힌다. 유일하게 입헌왕국의 수립을 성공시킨 사르데냐 왕국의 재상 카바르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싸우는 한편 각지 정부에 사르데냐와의 병합을 호소했다. 한편 니스 출신 혁명가 주세페 가리발디는 ‘붉은 셔츠단’을 이끌고 시칠리아섬에 상륙, 프랑스군을 패주시키며 나폴리까지 진군했다. 사르데냐는 급히 교황령을 점령했고, 가리발디가 사르데냐 국왕과 만나 통합한 남이탈리아의 주권을 국왕에 헌상하며 통일 이탈리아가 탄생한다.
통일은 이루어졌지만 남북의 빈부격차는 더 커졌고 사회 불만이 팽배해졌다. 1890년대부터는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하여 체제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급진적 내셔널리스트도 등장했다. 1차대전 이후에는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영토를 획득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며 폭동이 일어났다. 좌익조직의 리더 무솔리니도 노동자의 일제봉기와 사회주의 혁명을 예상했지만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후 그는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해 애국주의와 전쟁의 정당화를 선동했다. 무솔리니는 1922년 정부를 제압, 내셔널리즘과 전쟁을 구사하여 국가의 통합을 노린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성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