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이야기

중국 사상과 서양 사상을 융합

*&^$*(&$*KDLKJF 2021. 1. 2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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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중국 사상과 서양 사상을 융합하려는 중국인의 눈물겨운 노력
1840년 영국과 청과의 사이에 벌어진 아편 전쟁의 결과 청은 반식민지 상태에 빠졌다. 위기감을 느낀 관리와 지식인들은 몇 차례에 걸쳐 근대화를 시도했다.


먼저 흠차대신 임칙서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아편을 금지함과 동시에 문인들의 ‘경세제민’ 활동을 지원했다. 위원은 <해국도지>에서 서양의 군비와 훈련법을 채용하여 외국의 침략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는데, 이처럼 서양의 힘을 빌려 강국화하고자 하는 운동을 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중국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타 국가들의 기술로 보완한다’는 중체서용, 도기론 등의 이론은 특히 젊은 엘리트들이 지지했다. 
1890년대에는 황제의 협력 아래 이들이 변법운동을 전개했다. 서양의 산업이나 군사를 도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청의 정치체제나 법을 위에서부터 개혁하여 근대화하려는 운동이었다. 강유위 등 변법운동을 이끈 지식인들 역시 중국의 전통사상을 재해석하여 근대화 운동과 융합하려 했다. 


그러나 급진적인 제도개혁은 반발을 초래했고, 1898년 서태후와 보수파의 쿠데타 무술정변으로 중단되었다. 이어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열강 8개국 연합군에 베이징을 점령당하자 개혁파 지식인들은 청이 한계에 달했다고 보고 혁명 운동을 일으켰다.

35 ‘교통’으로 읽는 분열과 통합의 근대 미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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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 미국은 내륙교통로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교통로를 확충하기 시작했다. 동해안과 서쪽 내륙을 잇는 칸버랜드 도로가 건설되었고, 농축산물을 나르기 위한 하천교통에 증기선이 도입되며 남부와 서부가 이어졌다. 1820년대에는 서부와 동부를 연결하는 운하가 건설되었으며, 서해안과 내륙을 잇는 운하도 건설되었다.


이렇게 도로나 운하로 각 지역이 연결되면서 지역의 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 북부는 공업이 주를 이루었으며, 남부는 노예를 활용한 목화재배가 발전했다. 1830년 인디언 강제이주 정책으로 목화재배 면적이 늘어나면서 남부경제의 노예의존도는 강화되었고, 공업보다는 이익이 금방 나오는 목화재배에 투자가 몰려 공업화는 더더욱 늦어졌다. 


북부는 공업화로 생활수준과 소득은 올랐지만 지방에서 많은 노동자가 몰려오면서 사회불안이 커지고 있었다. 사회도덕 저하를 우려하는 기독교 단체나 운동가들에 의해 사회개혁운동이 지지를 얻는데, 대표적으로 금주운동, 무상교육을 보급하는 교육개혁, 여권운동, 노예제폐지운동 등이다. 이중 노예제폐지운동은 남북의 분열을 가져왔다.


연방의회에서도 번번히 노예제를 둘러싼 충돌이 일어나는 와중 1860년에 노예제를 반대하는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에 남부 주들은 ‘아메리카 연합국’을 결성하여 연방이탈을 선언하고 남북전쟁을 일으킨다. 이때 남북 교통망의 차이가 남북전쟁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목화를 실어 나를 항구로만 교통이 발달한 남부는 군수물자나 식량을 제때 공급하지 못했고, 4년 동안 62만5천명의 희생자를 낸 전쟁은 북 연방군의 승리로 끝났다.

36 ‘이슬람 문명은 왜 정체되었는가’를 둘러싼 신학 논쟁
많은 수의 이슬람 국가들은 구미가 해외진출을 본격화하자 식민지 또는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이슬람교가 기독교보다 우월하고 믿어 마지않던 무슬림들은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기독교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왜 이슬람은 정체했는가? 어떻게 하면 다시 이슬람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가? 종교학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성찰했다. 그들은 이슬람의 위기가 권력을 추종하는 문화를 초래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무슬림 사회의 타락한 부분을 제거하고 진정한 이슬람을 실현시키려는’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처음 개혁이 시작된 곳은 아라비아 반도로,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이슬람 복고운동이 벌어졌다. 개혁파는 호족 및 오스만 제국 총독과의 긴 투쟁 끝에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했다.
구미 기술이나 제도를 도입하여 강국이 되려는 시도도 있었는데 특히 터키가 대표적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는 칼리프제를 폐지하고 정교분리의 공화국이 되었다.


시리아 출신 법학자 무함마드 라시드 리다는 칼리프 폐지를 비판하는 한편 칼리프만으로는 새로운 시대에 대응할 수 없다며 칼리프와의 협의를 통해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운영하는 움마 주권의 대행자 역할을 하는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칼리프제를 부정한 법학자도 있었다. 이집트의 알리 압델 라지크는 칼리프는 예언자일 뿐이며 정치체제 선택은 인간의 이성에 맡겨져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슬람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알리는 전통법학자들에 의해 파면되었다.
이와 같이 현실 문제의 원인이 사람들의 타락에 있으며 이슬람이 본모습을 찾으면 해결될 것이라는 발상은 지금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으며, IS 역시 무함마드 시대로의 복고를 내건 원리주의 단체였다.

37 당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아프리카 토착 세력의 승리
19세기 아프리카에서 유럽에 대항해 독립을 지켜낸 나라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 단 둘이었다. 다른 국가들은 열강의 지배하에 떨어졌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 세력에 맞서서 승리한 케이스 둘을 소개한다.
19세기 전반, 이집트는 아직 열강의 손이 닿지 않은 수단을 침공해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집트 지배 아래 인프라가 정비되고 근대화가 진행되었지만, 이집트 관료의 착취에 사람들은 불만을 가졌다. 1881년 무함마드 아마드는 스스로를 마흐디(구세주)로 칭하며 이러한 불만분자를 규합, 무장 조직을 설립하여 수단의 도시들을 해방시켰다. 이집트는 영국인 대령을 초빙해 수단에 군대를 파견하지만 마흐디는 교묘한 전법을 구사해 승리를 이어갔으며, 마침내 수도를 함락시키고 구세주 마흐디 아래 이슬람에 기초한 신정일치 국가를 창설했다. 마흐디 국가는 점차 영토를 넓혀나갔으나, 계속된 대외전쟁으로 피폐해지면서 영국의 개입 앞에 무릎을 꿇고, 수단은 영국과 이집트가 공동통치하게 된다.
또 하나의 예는 줄루족으로, 남아프리카 동부의 유력부족이다. 줄루족의 지도자 샤카는 주변 부족을 통일하고, 군사개혁을 단행했다. 상비군과 발달한 무기, 전술로 샤카군은 연전연승하며 줄루 왕국의 판도를 넓혔다. 19세기 후반 줄루는 케이프타운을 점거한 영국과 맞붙게 되는데, 무기의 차이로 압도당하며 결국 멸망에 이르지만, 이산들와나 전투에서는 영국군을 열세인 무기로 괴멸시켰다. 이 전투는 아프리카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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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럽 군대에 승리한 몇 안 되는 케이스 중 하나이며 줄루 전사의 강인함은 영국인에게 오래 기억되게 되었다.


38 이집트판 ‘메이지 유신’은 왜 실패로 끝났는가


19세기 초 이집트에서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근대화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와의 대결을 통해 서양식 군대와 기술의 위력을 체험하고,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 이집트에서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에너지를 모아 근대화를 시도한 것이 무함마드 알리였다.
총독에 취임한 알리는 오스만 제국의 명목적 종주권 아래 실질적 독립국가를 구축하여 근대화정책을 실행한다. 징병제를 통해 병력을 증강하고, 효율적인 징세와 농산물 전매제, 국가주도의 제조업 육성을 시행하였으며, 보호무역을 통해 자국 산업을 육성했다. 


알리의 근대화로 이집트는 크게 발전했지만,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과의 대립도 심화되었다.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이집트군은 승리를 거듭하였으나, 영국이 개입하며 패배한다. 1841년 런던 조약으로 국군이 축소되고 전매제가 금지되었으며,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조약을 맺게 됨에 따라 알리의 유신은 무너지고 말았다.


근대화정책은 좋은 결과만 가져오지는 않았다, 군대와 인프라, 공장 정비에 들어간 막대한 비용이 회수되지 않아 빚이 늘어났고, 런던 조약 이후로는 해외금융업자의 고리대금으로 농민과 정부가 파산에 이르렀다. 결국 이집트는 영국․프랑스 양국의 재정관리 하에 들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