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같은 2차대전 속 모략전
46 속고 속이며… 영화와 같은 2차대전 속 모략전
2차 세계대전은 이전까지의 전쟁과 달리 대량살상무기가 사용되어 민간인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 정보나 모략이 고도로 구사된 것도 이전의 전쟁과 다른 양상이었다.
-거짓말로 베오그라드를 함락시킨 나치 장교: 1941년 나치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장교 프리츠 클링엔베르크는 베오그라드에 병사를 보내 시청에서 유고슬라비아 국기를 내리고 나치 독일기를 게양하게 했다. 놀라 찾아온 베오그라드 시장에게 그는 ‘베오그라드 시가 항복했다는 내 보고가 없으면 폭격기가 공격해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거짓말이었으나, 베오그라드는 바로 항복했고 클링엔베르크는 후에 훈장을 수여받았다.
-소련에서 활약한 샤혼 부대: 역시 거짓말로 소련이 독일을 속인 작전이다. 소련군은 포로로 잡혀 있던 독일의 샤혼 대령을 이용해, 독일군 사령부에 소련군과 싸우는 부대에 무기나 물자 보급을 부탁하는 연락을 보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이를 믿고 보내오는 물자를 가로챘으며, 이 작전은 44년부터 45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시체를 사용한 영국군의 작전: 익사체로 위장한 시체에 거짓 기밀정보를 두어 적을 속이는 작전이었다. 영국군은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실존하는 인물로 보이기 위해 시체에 주변인들의 편지, 사진, 청구서 등까지 만들어 넣었다. 거짓 기밀정보는 히틀러에게 보고되었고 히틀러로 하여금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했다.
47 2차대전 ‘추축국’ 편에서 싸웠던 나라들의 사정
2차대전의 대표적인 추축국은 나치 독일, 일본제국, 파시스트 이탈리아였으나, 세 나라에 협력한 나라도 많았다.
1차대전 패배 이후 국토의 72%, 인구의 58%를 잃은 헝가리에서는 토지를 되찾기 위해 나치 독일에 협력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어, 39년 독일의 폴란드에 침공에 발맞추어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에 침공, 구영토를 일부 되찾고 끝까지 추축국 편에서 싸웠다.
불가리아는 2차대전 발발 이후 한동안 중립을 지켰지만, 점차 독일에 협력하면 영토를 회복할 기회가 있다는 의견이 다수를 점했다. 이후 추축국의 전황이 악화하자 불가리아는 연합국과 강화를 맺으려 했지만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결국 소련에게 점령당했다.
타이는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를 재빠르게 오간 경우였다. 타이는 독일에 점령당한 비시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하고 일부 땅을 되찾기도 했는데,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는 일본과의 동맹 때문에 연합국에 선전포고해야만 했다. 그러나 일본이 열세로 돌아서면서 타이 정부의 대일협력 기조도 누그러들고, 섭정 프리디는 비밀리에 연합군과 연락하면서 항일조직 자유타이를 지원헸다. 그는 3인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선전포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고 피해다녔는데, 종전 후 타이정부는 프리디가 사인하지 않아 연합군 대상의 선전포고는 무효였다고 주장하며 전승국 편에 선다.
48 광신적인 비폭력·평화주의가 사람들을 움직인 시대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지만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평화주의’도 시대를 움직였다. 평화주의는 1970년대 베트남 반전운동으로도 이어졌으며 현재의 시민운동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간디의 사상은 ‘사회개혁의 수단으로서의 비폭력주의, 인생을 수행으로 보는 금욕주의’로 이루어졌다. 폭력을 전혀 쓰지 않고 단식, 행진, 불매운동 등으로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했다. 비폭력을 실천하는 간디는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국제적인 공감과 지지를 얻었다. 간디는 독립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본성을 얼마나 비폭력 평화주의로 수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도 같이 했다. 이것이 금욕주의로서, 욕망을 버리면 집착이 없어지고 분쟁도 없어지며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폭력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간디의 영향을 받은 사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백인과 흑인의 차별에 대항해 비폭력 평화주의로 맞섰다. 흑인을 차별하는 버스회사의 버스를 보이콧하여 걸어서 직장, 학교에 다니는 등의 운동을 펼쳤고, 법정에서도 버스회사와 싸워 대법원이 인종차별법에 위헌판결을 내리도록 했다. 킹 목사는 공민권운동을 벌이며 파업이나 시위 등의 협력 요청이 오면 최대한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공민권운동도 지지자가 늘어났고, 1964년 존슨 대통령이 공민권법 시행 문서에 사인하여 연방법에 존재하던 차별은 폐지되었다.
49 핵전쟁의 위기를 구원한 소련군의 잠수함 부함장
냉전 시대 사람들은 핵전쟁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았다. 핵전쟁의 위기가 가장 피크에 달했던 것이 1962년 쿠바 위기였다.
쿠바에서는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운동조직이 친미 정권을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도입했다. 카리브 해에 친소련 정권이 생기는 것을 간과할 수 없었던 미국은 61년 망명쿠바인 부대를 보내 암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했고,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들어갔다.
62년에는 소련과 쿠바 사이에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비밀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과 핵전력을 비등하게 만들고 싶은 소련과 미국의 개입은 막으려는 쿠바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쿠바 근해에서는 긴장감이 높아졌으며, 소련은 핵잠수함 B-59를 파견해 유사시 미 함대에 핵공격을 하도록 지시했다.
미국의 어뢰를 피해 깊이 잠수해서 모스크바와 연락할 수 없게 된 B-59에서는 미 함대에 핵공격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다. 이미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겠느냐는 함장과 정치장교를 부함장 바실리 아르히포프가 모스크바의 지시 없이는 안된다며 설득하고, 핵을 발사하지 않고 해상으로 올라왔다. 미 함대의 사이로 올라오게 된 B-59는 러시아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아르히포프의 판단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세계를 핵전쟁의 위기에서 구원한 것이다.
50 ‘마이크로네이션’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
마이크로네이션이란 ‘자칭국가’라고도 하며, 국내외에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가나 국제기관의 승인은 받지 못한 국가를 말한다. 마이크로네이션의 양상은 다양하여 실효지배하는 국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 특정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나라가 있고 인터넷 상의 나라도 존재한다. 1979년에 처음 생긴 마이크로네이션은 인터넷의 보급으로 폭발적으로 늘어 현재 67개에 달하며,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 추측된다. 진지하게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려는 경우도 있지만 재미로 선언하는 경우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독립을 선언한 경우도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세계가 연결되며 국가나 지역의 독자성이나 아이덴티티가 사라지고 있는 현재 국가란 어떤 것인가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