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이야기

형제싸움에서 탄생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KDLKJF 2021. 1. 28.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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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형제싸움에서 탄생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로마 제국 시대 갈리아라고 불렸던 지역은 서로마제국 해체 후 메로빙 조 프랑크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크 왕들은 아들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듯 국토를 분할시켜주었기에 영토가 자주 분할과 통일을 반복했다. 분할된 북동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서 궁재를 담당하다가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는 등 힘을 키워가던 카롤링 가는 751년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 카롤링 조 프랑크 왕국이 들어선다. 
카롤링 조 프랑크 왕국은 카를 대제 대에 군사원정을 통해 현재 서유럽 대부분을 정복했으며, 800년에는 프랑크의 왕이 서로마황제로 임명되어 기독교 수호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9세기경 영토 분할 문제로 프랑크 왕국에는 내전이 일어난다. 반복된 반란과 진압 끝에 루이 경건왕이 사망하고, 첫째 로타르와 둘째의 아들 피핀 2세의 연합, 셋째 루드비히와 막내 샤를의 연합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난 끝에 842년 베르단 조약으로 왕국을 평등하게 분할하는 데 합의했다. 이때 분할된 동부, 서부, 중부가 후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되었다.

15 북유럽을 통일한 환상의 대제국 <북해제국>
9~11세기 잉글랜드는 계속된 침략과 분쟁을 겪었다. 앵글로색슨과 덴족을 비롯한 바이킹과 노르만인이 잉글랜드의 패권을 두고 싸웠으며, 그 사이에서 통일된 북유럽 제국이 등장하기도 했다. 덴마크의 덴족은 9세기부터 잉글랜드를 침략해 앵글로색슨 왕국들과 세력을 겨뤘다. 1005년에는 덴마크왕 스벤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다. 스벤 1세 사후에는 장남 하랄이 덴마크 왕위를, 차남 크누트가 잉글랜드 왕위를 이었다. 크누트는 하랄의 사후 덴마크도 물려받았고, 1024년 스웨덴과 노르웨이 원정에 성공해 잉글랜드-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를 아우르는 ‘북해제국’이 출현했다.
크누트가 사망하고 그 아들도 자손 없이 사망해 덴 왕조가 멸망하자 노르망디에 망명해있던 에젤레드 2세의 아들 에드워드가 웨섹스 왕가를 부활시킨다. 그러나 에드워드도 후사 없이 사망했고, 유력 귀족 고드윈의 차남 해롤드와 북해제국의 후계자라 주장하는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가 왕위를 두고 분쟁을 벌이다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에드워드의 종형제 기욤이 건너와 윌리엄 1세로 즉위했다. 이로써 브리튼 섬의 이민족 침입 시대는 막을 내리고 프랑스식 제도나 문화를 도입한 노르만조 왕권이 성립되었다.

16 칭기즈 칸은 ‘정보전’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13세기 동방초원에 출현한 몽골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할린에서 도나우 하구까지 정복하여 유라시아 대륙 정치․경제를 지배했고, 하나의 거대한 경제권을 형성했다.
몽골이 유라시아를 석권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기동력 높은 기마군, 발달된 병기 기술, 승부심이 강한 유목민 기질 등과 함께 철저한 정보전도 있었다. 몽골은 특정 지역을 침공하기 전 미리 사자를 보내 칭기즈 칸과 그의 병사들이 얼마나 강하고 무자비한지 알리고 항복을 종용했다. 싸우기 전부터 사기를 떨어뜨리는 작전으로서, 항복하면 공정하게 대하지만 저항하면 철저하게 살육하고, 포로 중 일부는 다음 도시에 소문을 퍼뜨리는 데 이용되었다. 
넓은 지역을 제패한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각지의 유통망을 정비하고 육상 및 해상 유통을 장악했다. 또 은을 기본으로 하는 통화체계를 확립하고 자유경제를 장려했다. 지배 지역의 종교나 사회 등도 간섭하지 않아, 다문화․다인종․다종교․다언어가 공존하는 사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유라시아 대륙이 1310년에서 1380년까지 장기 이상기상과 재해에 시달리자 몽골 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한다. 원은 중원에서 몽골로 돌아가 북원을 세우고 중원의 명․청 제국과 양립하게 되었다. 이란 지역에는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여러 왕조가 일어났고, 서북고원에서는 우즈벡 국가나 카자프 유목국가, 카잔․한, 크림․한, 러시아 제국이 성립하거나 발전했다.


17 러시아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진짜 이유
고대 러시아 국가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러시아의 옛이름은 ‘루스’인데,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바랑기아인(노르만인)이 기원이라는 설과 그에 반대하는 슬라브설, 하자르설, 핀설 등이 대립하고 있다. 정설로는 8세기에서 11세기까지 스칸디나비아에서 유럽 각지로 이동한 노르만족 일부가 슬라브족 땅을 정복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 민족주의자나 범슬라브주의자는 루스라는 명칭이 이전부터 슬라브에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고대 루스인들은 ‘어머니 대지’를 비롯한 자연현상과 조상의 영, 자연의 정령 등을 숭배하는 다신교를 믿었다. 그런 루스가 정교를 수용한 것은 비잔틴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과의 교류의 영향이었다고 여겨진다. 키예프 루스의 대공 블라미디르는 비잔틴 황제의 권유에 따라 987년 정교로 개종하며, 영지의 통솔력을 강화하기 위해 집단 개종을 명하기도 했다. 
이후 루스의 정교 신앙은 점점 강해졌으며,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자 ‘우리야말로 기독교를 가장 바르게 이어받은 존재’라며 제3의 로마를 자칭하게 되었다.

18 누구나 정복하고 싶어 하는 도시, 콘스탄티노플
324년 로마 황제 콘스타티누스 1세가 동로마의 수도로 건설한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은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있는 ‘문명의 십자로’로서, 전 세계로부터 사람․물자․돈이 모이는 대도시였다. 동로마는 서로마와 달리 이민족을 잘 막아냈으며 고대 그리스로부터 이어지는 고전문화가 살아남았다.
동서 로마의 교회는 전례나 사상이 점점 달라졌으며, 급기야 1054년 양 교회가 서로를 파문하는 ‘대분열’이 일어났다. 이후 동로마의 정교회는 동방 기독교 교회의 맹주로서 절대적인 권세를 누렸다. 
콘스탄티노플은 끊임없는 포위에 시달렸는데, 비잔틴 제국은 그 대부분을 막아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에게 함락되어,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쫓겨나 인근에 망명정권을 수립했다. 1261년 비잔틴 제국이 부활한 뒤에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나갔으나, 신흥 유목민족 오스만 제국에 의해 1453년 함락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9 돈과 명예와 종교심… 십자군이라는 ‘현상’
십자군은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 무슬림에게서 해방하기 위해 1096년부터 1291년까지 9차례 파견되었다. 십자군이 일어난 원인은 여러 가지인데, 이슬람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서, 로마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치안을 어지럽히는 제후나 전사들을 이교도와의 싸움으로 내몰기 위해서 보내기 위해서 등이었다.
십자군은 ‘그리스도의 탄생지를 해방하기 위한’ 명분으로 시작했으나 성지 해방보다 약탈을 노리는 제후들이 많았다. 1차 십자군 당시에는 현지 도시들을 공략한 뒤 제후들이 그 도시국가의 영주로 자리 잡는 경우가 많았고, 예루살렘에도 예루살렘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후 무슬림과 십자군 사이에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전쟁이 계속해서 벌어졌는데, 십자군은 엉뚱한 도시를 공격하기도 했다. 특히 4차 십자군은 빌린 군자금을 지불하기 위해 베네치아의 적대 도시들을 공략하는 데 협력하거나 비잔틴 제국의 권력 싸움에 개입했다. 제국의 정권이 바뀌며 십자군에게 약속한 대금을 지불하지 않자, 분노한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고 그 자리에 라틴 제국을 건설했다. 예루살렘은 탈환했지만 적과 싸우지 않고 교섭으로 타협했다는 이유로 교황이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상대로 십자군을 소집하는 일도 일어났다. 최종적으로는 1291년 예루살렘 왕국이 소멸하면서 십자군 시대는 막을 내렸다.

20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서 태어났다
오스만 제국은 터키(투르크)계 유목민을 중심으로 한 다민족 집합체 오스만 집단을 모체로 한다. 셀주크 왕조가 쇠퇴한 13세기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중소 무장세력들이 항쟁을 벌였는데, 오스만 집단도 그 무장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오스만 집단은 재력과 군사력을 키우며 영토를 확장했다. 동시에 내정도 정비하여 군사집단에서 오스만 가를 톱으로 한 ‘제국’으로 변모해나갔다. 
15세기 정복왕 메흐메트 2세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꿔 수도로 삼았다. 전사 집단으로 시작한 오스만이 전통이나 역사, 격식에 얽매이게 된 순간이었다.
이처럼 오스만은 유럽 국가로서 출발했지만 16세기 이집트, 시리아, 메카와 메디나까지 확장하며 ‘이슬람의 맹주’로 기대받게 된다. ‘로마 제국의 후계자’와 ‘이슬람의 맹주’라는 2중의 역할을 맡은 제국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