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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잇따른 정복을 경험한 고대 영국
브리튼 섬은 다양한 민족의 침입과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3000년경에는 대륙에서 청동기를 가진 비커인이, 기원전 7세기경에는 철기를 가진 켈트인이 넘어왔고, 기원전 2세기말에는 역시 켈트계인 벨가이족이 더 나은 철기 기술을 가지고 건너왔다.
다음으로 침공해온 것은 로마였다. 기원전 55~54년 카이사르의 브리튼 섬 침공으로 남동부 브리튼은 카이사르에 복속된다.  
3~4세기 게르만족이 로마로 남하하면서 제국의 방위 시스템이 흐트러지자 색슨족과 스코트족, 픽트족 등이 브리튼에 침입, 브리튼족은 남부나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으로 내몰렸다.
5세기 전반부터는 덴마크와 독일 북부에서 살던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 섬을 약탈하다가 점차 정착하기 시작했다. 앵글로색슨족은 2세기에 걸쳐 브리튼족을 북부와 서부로 내몰았으며, 이것이 현재의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기원이다. 

07 예수는 기독교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예수의 출신지인 팔레스타인에는 유다 왕국이 있었지만 기원전 63년 로마의 영향 아래 들어가 후에는 속주로 로마에 통합되었다. 나라를 잃은 유대인은 구세주의 강림을 기다렸다.
그런 시대에 태어난 예수는 30세 때 세례를 받은 후 유대교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다녔다. 사람들은 예수가 구세주로서 유다 왕국을 되찾을 것을 기대했지만 예수는 오로지 신에 뜻에 따르는 삶을 살라고 이야기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 제자들이 계승하여 원시 기독교를 탄생시켰고, 1세기가 지나지 않아 기독교는 로마 제국 각지로 전파되었다. 로마 황제와 시민들은 기존 시민공동체 가치관과 맞지 않는 기독교도들을 박해했으나 3세기에 들어 제국 내외로 혼란이 일어나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마침내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어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이후 기독교는 전통적인 도시와 시민공동체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부여했다. 

08 고대 기독교 대논쟁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성부과 성자와 성령의 관계, 그리고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는 4세기 기독교회를 뒤흔든 신학논쟁의 주제였다.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등을 통해 이들 주제를 논의해나갔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성자(예수)가 성부(신)보다 하위의 존재라는 의견을 배격하고 둘을 같은 존재로 인정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성령도 성자와 마찬가지로 성부와 같은 존재임을 결의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예수에게는 신성과 인성 둘 다 존재한다는 ‘양성론’이 옳다고 결정했다. 카톨릭, 정교, 프로테스탄트는 칼케돈 공의회의 결론을 받아들여 발전했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은 일부 종파가 시리아, 아르메니아,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에 전파되었고 당까지 건너가 ‘경교’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형성했다.


09 훌리건의 폭동으로 실각할 뻔한 유스티니아누스
유스티니아스 재위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전차경기가 유행했는데, 4개 팀의 팬은 각각 정치적 파벌과 결합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그중 유스티니아누스를 지지하는 청색당은 전임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일족을 지지하는 녹색당 소속 시민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일이 잦았다.
532년, 녹색당은 전차경기에서 황제에게 피해를 호소했으나 황제는 도리어 녹색당을 비난했다. 이 일로 황제를 비판하는 녹색당과 청색당이 충돌하며 폭동으로 발전한다. 폭동 진압 이후 두 세력은 함께 정부의 부패를 비난했고, 민중의 폭동은 아나스타시우스의 조카 히파티우스를 새 황제로 내세운 쿠데타로 변모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궁을 탈출하려 하지만, 배우자이자 공동통치자였던 테오도라가 굴욕적으로 도망가느니 끝까지 황궁을 지키겠다고 선언. 그 말을 들은 유스티니아누스는 폭동 진압을 결심하고, 청색당이 녹색당과 손을 끊고 경기장에서 나가게 한 뒤 녹색당만이 남은 경기장에 3천의 병력을 보내어 3만 명 넘게 학살했다. 
위기를 넘긴 유스티니아누스는 대외전쟁을 통해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부분적으로 회복하고 산업진흥, 문화진흥 등에 힘을 쏟으며 동로마의 황금시대를 이끈다.

10 현재 인도에서 불교가 ‘신흥종교’인 이유
고대 인도에서는 베다와 카스트 제도에 기반한 바라몬교가 지배적인 종교였으나, 기원전 600~500년경에는 바라몬교의 가르침에 대항하는 사상을 주창하는 자유사상가들이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불교의 창시자 석가이다. 석가는 깨달음을 얻은 뒤 제자를 모아 구제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바라몬교 경전과 달리 붓다가 만든 규범 비나야, 수트라는 인도인의 언어로 쓰여 일반 민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 시대 불교가 국가권력과 결합하며 크게 확대되고 불교예술도 꽃피지만, 기원후 320년에 성립된 굽타 왕조는 바라몬 중심의 사회로 돌아갔다. 바라몬교는 각지의 자연숭배나 민간전승 등을 흡수해서 힌두교로 탈바꿈한다. 붓다는 힌두교 신의 하나로 포섭되었으며 불교 역시 힌두교 신을 불교의 신으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불교와 힌두교의 경계는 점점 애매해져갔으며, 11세기 이슬람의 침공 이후 인도에서 불교는 거의 소멸되었다.
인도에 불교를 재도입한 것은 불가촉천민 출신 초대 법무대신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로, 불교에 기초한 평등한 사회를 호소하며 1956년 30만명의 불가촉천민을 모아 집단으로 불교로 개종을 선언했다. 현재 인도 불교는 카스트 제도 타파와 구제를 위한 사회개혁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11 ‘중화세계’의 탄생 
황하문명은 기원전 5~6천년 경 황하 유역에 발생한 문화로서 하와 은, 주가 이 문명해 속했다. 황하문명은 ‘중화’의 시작으로 하夏, 제하諸夏, 하화夏華 등으로 불렸다. 한편 장강 중류 유역이나 동북 요하 유역에도 문명의 기원이 있었다고 하며 특히 장강문명은 황하문명과 대립하며 오래 지속되었다. 
연합국가에 가까운 은주시대를 거쳐 춘추시대 초기의 국가는 언어․경제․문화를 공유하는 지역에 기반하였다. 춘추시대의 패권 국가는 원래의 질서를 유지하려 했으나, 점차 제후들간의 밸런스가 무너지며 전국시대에는 대규모 군을 동원한 영토획득 전쟁이 이어졌다. 특히 가장 서쪽에 있던 진이 군사력을 크게 증강하여 이윽고 천하통일에 성공했다.
황하문명이 낳은 ‘하’ ‘하화’ ‘제하’의 개념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확장되었다. 진은 원래 스스로도 제하로 인식하지 않았으나 통일된 제국은 제하=중화가 되었다. 이후로도 중국인은 바깥의 ‘오랑캐’와 ‘중화’를 대조적으로 인식하였으며, 물리적으로 지배영역을 확장하면 중화세계도 확장되었다.


중세


12 이슬람의 역사를 회사의 창업 스토리에 비유해보면
무함마드는 40세경 명상 중 신의 계시를 받고 예언자임을 자각하여 포교를 시작했다. 무함마드는 당시 메카의 다신교와 향락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하며 신의 명령 아래 평등하게 질서를 지키며 살 것을 호소했다.
회사로 비유하자면, 중견사원인 무함마드가 회사 개혁을 주장하며 경영진과 매니저 층의 퇴진을 요구한 셈이다. 지위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경영진은 무함마드의 호소를 탄압했고, 이에 무함마드는 메카를 떠나 메디나라는 새로운 회사를 차려 사장으로 취임했다. 
무함마드가 이끄는 메디나사는 메카사를 제치고 성장했으며, 메카사를 경영통합한 후에도 계속 규모를 확대해 아라비아 반도 중소기업들을 영향 아래 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무함마드의 급사 후 메디나사는 위기를 맞지만, 사장대리(칼리프)의 지도 아래 회복하고 페르시아사를 병합, 비잔틴사의 주식도 반 이상 쥐게 된다. 4대 사장대리 알리는 메디나가 가족기업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다마스쿠스 지사장 무아위야는 이에 반대했고, 5년의 싸움 끝에 알리는 살해되며 본사 기능은 다마스쿠스에 이전되고 사명은 우마이야사로 바뀌었다. 
무아위야에서 시작되는 ‘회사의 통합과 안전한 이익’을 중시하는 일파는 후에 수니파가 되었으며 알리가 주장한 ‘일족경영과 평등주의’를 중시하는 일파는 시아파가 되었다.

 

13 스페인을 탄생시킨 작은 싸움

서로마 제국 이후 이베리아 반도는 약 300년 동안 서고트 왕국이 지배했다. 그러나 8세기 초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이 일어났으며,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을 석권한 아랍 제국이 여기에 관여하면서 서고트 제국은 붕괴하고 만다. 이슬람 세력은 겨우 3년 사이에 이베리아 반도 거의 전부를 정복. 살아남은 서고트 귀족 돈 펠라요는 이베리아 반도 서부 칸타브리아 산으로 도주했는데, 아랍 장군의 본국 개선으로 칸타브리아 정복은 중단되었다. 

안달스라고 이름붙여진 이슬람 스페인은 갈리아, 현재 프랑스 지역에도 원정군을 보냈다. 원정군은 남프랑스 일부를 점령했지만 721년 전쟁에 패하며 안달스 총독도 전사했고, 오명을 씻기 위해 칸타브리아를 다시 공격했다.

그러나 722년 스페인 북서부 코바동가에서 아랍 제국군 약 2000명은 돈 펠라요의 작은 부대에게 대패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세력이 처음으로 이슬람 세력에게 승리한 것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돈 펠라요는 이베리아 북서부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국했고, 이 왕국이 후에 카스티야 왕국이 되었으며 스페인의 직접 선조인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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