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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인도의 역사와 전통 앞에 좌절한 무갈 제국
풍요로운 토지가 펼쳐진 북인도는 중앙아시아나 서북아시아 이민족들의 정복을 수차례 경험했다. 11세기에는 이슬람이 침공해왔고, 13세기에는 터키계 무슬림에 의해 델리 술탄조가 성립했다. 16세기에는 중앙아시아 출신의 바부르가 무갈 제국을 세웠다. 바부르는 인도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저 사마르칸트 탈환을 위한 자금을 모아서 떠나려 했으므로 인도의 민중을 착취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비해 3대 황제 아크바르는 인도에서 나고 자라 인도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했으며, 무슬림이 힌두교도를 착취하는 구조로는 한계가 올 것이라 판단하고 힌두교도와 힌두교 문화를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아크바르는 통치시스템 개혁도 시도했다. 지방 세력을 모아 장교로 임명하고 지위에 따라 급여를 주어 황제의 영향 아래 두려 했다. 또한 제국 국토를 왕실직할령으로 만들어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하려 했다. 마지막으로 장교가 급료로 병마를 마련했는지 정기적으로 확인했다. 이 같은 개혁은 1575~76년 단행되었으나 관료와 군인의 부패로 제대로 운용되지 못한 채 끝났다.

23 엘도라도를 찾던 스페인의 아메리카 진출
남아메리카에서는 기원전부터 선주민족이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으며 중세에는 잉카 제국이나 아즈텍 제국 등 대제국이 번영했다. 그러나 유럽의 침입으로 100년도 지나지 않아 전혀 다른 사회로 변모했다.
레콘키스타를 완수한 스페인은 콜럼버스를 지원하며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하여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황금에 대한 열망과 광적인 기독교 신앙, 이교도를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잔인함으로 무장한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비롯한 아메리카의 원주민 왕국들은 차례차례 무너졌다. 멕시코부터 칠레까지 포르투갈령 브라질을 제외하고 중남 아메리카는 거의 전부 스페인 왕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베리아풍의 대도시가 출현하고, 대규모 농장과 목장에 흑인 노예가 일하게 등 원주민 사회와는 전혀 다른 라틴 아메리카 사회가 성립되었다.

24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분쟁의 시작
1517년, 독일 신학자 마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가 판매한 면죄부에 대해 95개조 논제를 발표했다. 면죄부는 ‘현세에서의 죄를 지우고 연옥행을 면제하는 문서’이다. 민중들은 이익을 챙기려 하는 성직자들에게 크게 분노했으며 루터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1523년경부터 종교개혁의 바람은 도시에서 농촌으로도 퍼졌다. 대국인 헤센과 프로이센 기사단령 등이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이에 대항해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남독일, 스위스 도시들에서 반루터 전선을 구축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루터파 탄압을 명했는데, 프로테스탄트 제후와 도시는 여기에 반발하여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했다. 두 세력은 대립 끝에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로 타협하여 일시적으로 갈등을 봉합했다. 화의에서는 ‘하나의 지배자, 하나의 종교’ 원칙이 세워져 영주는 다른 종교를 가진 신하를 쫓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동맹 내 단결은 더욱 공고해지고 적대 종파와의 타협은 더욱 힘들어졌다.

 

 


25 30년 전쟁으로 독일을 파괴한 전쟁 사업
1607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가 루터파 도시를 억지로 카톨릭으로 복귀시킨 사건으로 양쪽의 증오가 커져 프로테스탄트 제후는 동맹(유니온)을, 카톨릭 제후는 연맹(리가) 을 결성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도 프로테스탄트가 탄압을 받자 분노한 프로테스탄트 보헤미아 귀족들이 프라하성에 들어가 황제의 관리를 창밖으로 던졌으며, 이것이 30년 전쟁의 발단이 된다.
전쟁은 독일 내 제후들과 체코인 용병, 카톨릭을 견제하려는 프로테스탄트 덴마크와 스웨덴, 스웨덴의 동맹국 프랑스까지 개입하며 약 30년간 이어진다.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카톨릭세력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카톨릭이 프랑스, 스웨덴이 이끄는 프로테스탄트에 패배하여 막을 내렸다. 강화조약인 웨스트팔렌 조약에서는 칼뱅파의 권리가 인정된 것 외에는 구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승자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지역으로 영토를 넓혔고,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 소유였던 알자스 지방을 차지, 후에 독일과의 분쟁의 씨앗이 된다.

26 술과 여자와 노름! ‘카리브 해적’의 황금시대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교역을 독점하고 타국과의 교역을 금하는 정책을 폈으나, 스페인과의 교역만으로 물자를 보급하기 어려운 식민지에서는 밀무역이 성행했다. 단속하려는 스페인에 맞서 무장하고 저항하며 스페인 선박을 빼앗고 재화를 약탈하기도 했으니 이것이 카리브해 해적 ‘부카니에’의 기원이다. 부카니에는 처음에는 토투가에, 나중에는 포트 로열에 본거지를 두고 번성했다.
한편 북아메리카에 13개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도 식민지의 타국 교역을 금지했고, 역시 해적이 발생,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해적의 황금시대가 열린다.
해적의 황금시대는 30년 전쟁 이후 상비군을 두게 된 유럽이 강화된 해군력으로 해적을 단속하면서 끝났다. 그러나 해적행위는 그 후에도 ‘국가주도’의 사략행위로 이어졌고, 사략선의 활약을 통해 영국은 해상패권을 쥐게 된다.

 

 


27 중국인 왜구가 활약한 아시아의 대항해시대
소빙하기가 끝나고 명이 들어서며 중국은 다시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시작했고, 이에 따라 동남아시아산 물건의 수요가 높아졌다. 명조는 사무역을 금지시키고 조공무역을 통해 국가들과 거래했는데, 상대 국가에게도 큰 이익이 되었으므로 많은 나라가 조공관계를 맺어 중국 제품을 입수하려 했다. 이를 통해 동남아시아에서는 마라카 왕국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도시가 발전하며, 최대한 낮은 관세율로 전세계 상인들을 끌어모으려 했다.
한편 조공무역의 또 하나의 목표는 국가가 무역을 통제함으로써 왜구 등 해적을 없애고 해상과 연안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해상교역을 생업으로 하던 중국 남서부 연안 사람들은 감시를 피해 밀무역을 했으며, 단속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집단을 이루었다. 이것이 ‘후기 왜구’이다. 14~15세기 전기 왜구는 모자라는 식량을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약탈하려는 일본인이었으나, 16세기부터의 후기 왜구는 대부분 중국인이었다. 특히 은 생산이 확대된 일본과 은이 부족한 명과의 사이에서 밀무역을 통해 왜구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28 중국의 영토는 멕시코의 은으로 세워졌다?
이미 활발했던 아시아 시장에 유럽인도 뛰어들었다. 전통적인 아시아 무역은 자유무역이 주류로, 다인종․문화 교역집단에 의한 교류가 특징이었으나 유럽은 무력으로 경합하며 이익을 독점하려 했다. 또한 동남아시아에서 유럽으로의 주요 수출품인 향신료를 안정적으로 입수하기 위해 토착 정치세력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6세기초 포르투갈이 마라카를 무력으로 제압한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은 필리핀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일부를, 영국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를 식민지로 삼았다.
스페인은 교역 중심지였던 마닐라를 브루나이 왕국에게서 빼앗아 식민지 정부를 세우고 멕시코와 마닐라를 잇는 태평양 정기 항로를 개척했다. 이 항로를 따라 신대륙에서 대량의 멕시코산 은이 유입되었고, 이 은을 중국이 탐욕적으로 매수했다. 
이 시기의 스페인과 중국의 활동은 지금까지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교역으로 벌어들이는 돈에 만족한 스페인은 필리핀 내 인프라 개선에는 투자하지 않았고, 대도시 마닐라와 눈에 띄는 산업이 없는 지방으로 이분된 현재 필리핀의 구조적 문제가 이 시대를 원점으로 한다. 중국은 은 유통에 의해 경제가 발전하고 이를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 확장된 영토에 중국농민의 이주가 진행되고 현재 중국의 영토 원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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